[존재 이야기] 너는 특별하단다. (맥스 루카도)

목수 아저씨 엘리는 저마다 특별한 사랑을 가지고 웸믹이라는 작은 '나무 사람들'을 만든다. 웸믹들은 모두 한 마을에 같이 산다. 그런 웸믹들은 금빛 별표와 잿빛 점표가 든 상자를 들고 다니며, 서로에게 별표나 점표를 붙인다. 별표는 자랑거리였지만 점표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점표가 많았던 펀치넬로는 우연히 루시아를 만난다. 루시아는 다른 사람들이 별표나 점표를 붙이면 그것이 이내 떨어졌다. 펀치넬로는 그런 그녀를 보고 놀라고 그녀를 통해 자신을 만든 엘리 아저씨를 만난다. 펀치넬로는 이내 알게 된다. 별표와 점표를 허용한 것은 자기자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누가 뭐라고 평가하던 `나는 나'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특별하다는 사실을. 그 순간 그에게서 별표와 점표가 떨어져 나갔다.  

<너는 특별하단다. - 저자 맥스 루카도


  

삶에서 힘들었던 것이 축복이 될 수 있다. 큰 눈으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가던 여섯 살 꼬마 계집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녀의 엄마는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아유, 재가 남자아이였다면 우리 원철이(셋째)를 낳지 않았을 거여요." 라고 이야기했다. 1970년대에는 남아선호 사상과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범국민운동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그 말을 들은 꼬마 아가씨의 마음 속에는 "그렇담 난 왜 태어났지?"라는 질문이 생겼다. 이후 그 질문은 30년 넘게 그 아이를 따라 다녔다.

 


36년 전 내 이야기이다.  그 날 이후 내게 '둘째=불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삶에서 가장 큰 ‘점표’가 되었다. 이후 부모님에게 별표를 받기 위한 내 눈웃음과 애교가 시작되었다. 커가면서 별표를 받아야하는 대상은 선생님들로, 친구들로, 주변 사람들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영어는 내 삶에서 가장 큰 별표였다. 중학교 1학년 처음 배운 영어는 내게는 신기한 존재였다. "어떻게 이거 가지고 어떻게 눈 파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지?" 또랑또랑한 내 목소리는 영어와 잘 어울렸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내가 책을 읽으면 영어발음이 예쁘고 영어를 잘 한다며 칭찬해주었다. 그때마다 영어수업시간의 내 목소리는 더 커졌다. 국어시간에 책 읽을 때면 나는 여전히 떨었다.

사람들은 내가 영어를 할 때 내게 별표를 잔뜩 붙여주었다. 난 큰 별표들을 받는 맛에 쏙 빠졌다. 시간이 되고 돈이 될 때마다 영어학원을 다녔고 외국을 나갔다. 별표들을 몇 개 받고 나면 한동안 외롭지 않았다.

 

20대도, 30대도 나는 친구들에게 또는 초면의 사람들에게 내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튀는 행동도 하고 밥도 샀다. 30대 초반까지 내 화장도 '나를 좀 봐주세요' 하면서 입술은 빨갛고 눈덩이는 파랬다. 머리도 노란색, 분홍색, 갈색으로 물들였다. 주변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기분이 좋았고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속이 상했다.

 

반면 나는 여자인 것도, 둘째인 것도, 한국사람인 것도 싫었다. 파란 눈에 노란 머리의 미국사람은 키도 크고 잘 생겨 보였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미국인들과 “I want an orange. I want this.” 수준을 넘지 않는 대화를 하는 내 자신이 못나 보이고 자존심도 상했다. 내 자신이 바보라 여기며 나는 내 스스로가 내 몸에 점표를 덕지덕지 붙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내면은 허무해졌다. 영어 좀 해보겠다고 미국을 가도, 영어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 돈을 2배를 더 벌어도, 대학원을 들어가도,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에 입사를 해도, 내 삶의 근원적인 질문 “나는 왜 태어났지?”에서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그 질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도망가기 위해 20대 때는 술은 마시기를 여러 날이었다. 술을 마실 때는 그 질문을 잊었으니까.

 

하지만 술이 깨면 현실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 질문에 답을 찾지 않으면 숨막혀 죽을 것 같았다. 나는 회사를 떠났다. 2003년 9월 나는 미국 뉴욕으로 갔다. 여행을 하면서 쉬면서 나는 내 마음을 정리했다. 3 주 후 나는 경상도 봉화 축서사로 갔다. 축서사에는 내 스승이신 무여스님이 계신다. 1999년 나는 불법을 만났고 2000년 내 스승을 처음 만났다. 나는 2003년 9월부터 2004년 4월까지 봉화 축서사에서 200일을 보냈다.

200일 기도 기간 동안 나는
회색 몸빼(?) 바지를 입고 하루 10시간 이상을 법당에서 기도했다. 내 스승님이 시키신 대로 나는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더불어 하루 두 시간씩 공양간(주방)에서 설겆이를 하고 법회 심부름을 도왔다. 서른하고도 다섯 해 동안 살면서 했던 설겆이보다 절에서 한 달동안 했던 설겆이가 더 많았다. 스님들 말씀에 절을 하면 마음이 맑아지고 내면을 잘 볼 수 있다 하셨다. 수백번을 1080배를 하고 수십번을 삼천배를 했다. 200일 사이에 10킬로가 빠졌다. 대학교 4학년때 미국연수 가서 10킬로가 빠진 이후 2번째다.

 

기도가 끝나고 1년이 넘게 흘렀다. 2005 12 28일에도 나는 겨울 영하 10도의 법당에서 등에 땀이 나도록 절을 하고 있었다. 겨울 휴가를 산사에서 보내기로 했던 참이었다. 그때 무엇인가 강력한 충격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쿵~ 하고 내려왔다. 그건 사랑이었다.

내 내면은 내게 이야기했다. "네가 태어난 이유가 바로 사랑이야." 나는 당황했다. "사랑? 온 세상이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쓰고 말하는 그 사랑? 딸랑 그거?"
나는 당황했다. 마음수행을 하면 뭔가 대단한 그 무엇이 있을 줄 알았는데, 삶의 목적 또한 대단할 줄 알았는데 그냥 '사랑'이란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후 며칠간 밥 먹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세상이 보이고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냥 뭔가 알아진 듯한 그 느낌! 나는 계속 웃음만 나왔다.

별표와 점표가 내가 아니었다. 세상은 항상 그렇게 존재해왔다. 둘째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였다.
예전의 관점이라면 나는 둘째고 여자였기 때문에 태어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법당에서의 순간 이후 나는 내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거기다가 둘째들에게는 집 안에서 첫째에 비해 적은 책임감이 있었다. 그 덕분에 세상의 많은 둘째들이 더 자유롭게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붙여준 별표와 점표는 내가 허용할 때만 별표가 되고 점표가 되었다. 사람들이 "윤경이는 둘째야."라고 말했고 나는 그것을 점표로 인식했다.

엄마는 "우리 윤경이, 우리 여우 새깽이"하면서 내 엉덩이를 두드려주시며 안아주곤 하셨다. 하지만  나는 내 이마에 "나는 둘째예요."라고 써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그 점표는 내가 내 자신에게 부여한 가장 큰 별표였다.  그 점표 덕분에 나는 지난 30년 간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찾기 위해 국내외를 다녔다. 2005년 12월에 나는 인간은 태어난 존재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것을 가슴으로 깨달았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사랑이고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 그 깨달음 덕분에 내 생각은 깊어졌고 영혼의 친구들(소울 메이트)이 생겼다. 존재 이유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도 생겼다. 나는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리라.

 

나는 별표도 점표도 아니었다. 또한 별표가 점표가 되고, 점표가 별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 천직인 코칭을 만났다. 아니 그것들을 알았기에 코칭이 내 천직이 되었다.

2005년, 가슴으로 사는 삶을 알았다. 지난 5년간 나는 많이 웃었고 많이 울었다.  성공도 시행착오도 많았다. 나를 통해 인생이 바뀐 분들도 수백명이다.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족한 내 모습에 실망하고 떠난 분들도 있었다.

2010년 12월이 되었다. 이제 나는 별표에서도 점표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

누군가 나에게 삶에서 가장 감사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1969년도에 한국에서 우리 부모님의 둘째딸로 태어난 것입니다.

 

“나의 별표는 무엇인가, 나의 점표는 무엇인가?

“이 별표에서도, 점표에서도 자유롭다면 나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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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l Comment l Category One & Only Coach Academy l posted at 2010. 12. 13. 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