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꽃 Sharon 이야기] 영어전공 콤플렉스: 전공이니 영어 잘 하겠네(1)

고 3때 저는 제가 꽤 성숙해서 제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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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잘 했던 저는 동시통역사가 되고 싶었고 그렇다면 동시통역대학원이 있는 외대에 가야만 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사회에서 더 알아주는 대학에 가라고 권유하셨지만 제게는 학교보다는 학과가 더 중요했기에, 저는 결국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 당당히(?)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입학을 하고 전공시간에 들어가면서 통역사라는 꿈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영어강독이며 듣기실습시간은 내용도 어려웠고 공부할 것이 많았지요.

과(科)의 대다수 친구들과 저는 회화수업 시간에 전전긍긍했습니다.
수업시간에는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그 유명한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만 원어민 수준이었습니다!!!

과(科) 친구들과 저는 미팅을 하건, 어학원을 가건 전공이 영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과 친구 한명과 학원에 가면서 ‘우리, 전공이 영어라는 말을 하지 말자.’ 라고 서로 다짐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영어를 하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술을 마시면 혀가 잘 돌아가 영어가 잘 나온다면서 과 친구 한명과 맥주집에 가서 되지도 않는 영어로 떠들기도 했습니다. 그나마도 그때뿐이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우리들 대부분은 4년 내내 영어회화 콤플렉스에 시달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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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l Comment l Category My True Self Journey l posted at 2007. 12. 25. 02:50

[한국의 꽃 Sharon 이야기] 두려움과 맞서기: 우리 30+세대는 두렵다(1)


90년대 미국 어학연수 때 일입니다.

사촌 언니, 사촌오빠와 영화를 보러갔다가 주차장으로 나서는데 제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언니와 오빠에게 차 안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저 혼자 극장에 다시 돌아갔습니다.

입구에서 일하는 검표원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Excuse me. I think I lost my wallet here in this movie theater.' 하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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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검표원 왈 ‘Excuse me?' 저는 다시 'Wallet.' 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다시 알아듣지 못했고 전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가 제가 당황하는 모습에 공감을 하며 도우려고 했다면 그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하고 창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침 사촌오빠가 돌아오지 않는 제가 걱정되어 극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빠는 검표원에게 정황을 설명하고 저는 극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지갑을 찾았습니다. 저는 오빠에게 말 그대로쪽 팔렸습니다’.

명색이 영어 전공자가 3년 반 동안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도 미국에 와서 wallet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아니면 그 검표원의 청취력에 문제가 있거나!) 땀을 흘렸습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평소 발음 좋다고 주변의 부러움을 받던 저였는데 미국에 가니 잔뜩 위축되었습니다. 제 발음을 알아듣지 못할까봐 주눅이 들어서 자꾸 목소리가 기어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상대는 더 못 알아듣고 저는 더 주눅이 들고 해서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그래도 미국 원어민 앞에서 영어를 하는 것은 차라리 나았습니다. 한국말과 영어를 둘 다 잘하는 2세 교포들 앞에서는 영어가 더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저는 교포들이 제가 영어 하는 모습을 보고 형편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니끈기가 답이었
습니. 부끄러움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니 영어 실력이 향상이 되고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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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l Comment l Category My True Self Journey l posted at 2007. 11. 5. 09:20

[한국의 꽃 Sharon 이야기] 진주의 잉태 - 아픔은 성장을 낳는다(1)

저는 중고등학교 때 영어를 좋아했습니다. 동시통역사가 멋져 보였고 동시통역대학원으로 유명하다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 진학하기로 했습니다.

제가 입학하던 1987년도는 6.29 선언이다, 이한열 열사의 죽음 등 민주화 운동으로 소란스러웠습니다. 선배들은 반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갔고 1학년인 우리들에게 이념 써클과 학회 스터디를 권유했었습니다.

대학 입학 전까지만 해도 ‘운동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저였지만, 고 3 때 ‘건대 사태‘가 발생했는데 그때 언론에서는 '건대 시위가 체제 전복을 하려는 급진 운동권들의 소행이며 그 시위가 북한의 공작이다.' 라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지원과 협력관계를 필요로 하는 정부에게 그들은 위험한 친(親)공산주의자였습니다. 마침 언니의 친구 중 한명이 그 시위에 가담하여 건물 속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언론의 말을 무조건 믿었던 저는 그 언니가 간첩이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입학 후 그 선배들이 들려주는 사회, 광주 그리고 정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간 언론에서는 편파보도를 한 것을 알았고, 민주화 운동으로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계속 파행으로 치달았고 많은 교수들이 어용으로 몰렸었습니다. 나는 교수님들과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도 갖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영어 전공’과 ‘반미’는 묘한 관계라 조용히 혼자 영어를 공부하고 서구의 언어, 문화 그리고 사회를 공부한다면 ‘친미주의자’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고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의 제 시각으로는 ‘반미’가 아닌 ‘승미(勝美, 미국 앞지르기)’ 또는 ‘협미(協美, 미국과 윈윈 협력)’가 해결책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선배들과 우리는 세계의 흐름을 보며 미국으로부터 배우려 하기보다는 공부 자체를 거부했고, 우리 20대의 젊은 혈기는 뜻있는 시민들과 함께 민주화와 정의를 외쳤습니다.

서서히 기성세대가 주장하는 삶의 방식마저도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하라는 대로 대학교 졸업해서 직장 잡고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사는 ‘행복 시나리오’가 의심스러웠졌고, 우리 모두가 태어난 데에는 좀 더 심오한 그 무엇이 있다고 느꼈졌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그 심오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점점 공부에 대한 관심을 잃었고 수업일수도 간신히 채웠고, 저는 대학시절 간신히 평점 B학점을 유지했었습니다.

주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의 가슴에 열정이 있었으나 분출할 곳이 없었고, 우리들은 술을 마시며 사회를 성토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졸업할 때가 가까워오니 이제는 취업 준비로 다들 마음이 바빴습니다. 대학 4학년이 되어 ‘반미’를 외치는 학생의 수는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대해서는 막연했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준비할 일도 없었습니다.

‘해외연수를 가볼까’, ‘학원 강의를 해볼까’ 또는 ‘어학원에 좀 더 다녀 영어실력을 늘려볼까’하는 두서없는 생각이 이어졌고, 이런 생각들을 실행에 옮겼지만 여전히 저는 출구를 몰라 답답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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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l Comment l Category My True Self Journey l posted at 2007. 10. 16. 09:13